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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도메니카 마자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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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리아 도메니카 마자렐로는 이탈리아의 살레시오 수녀회 창립자이다. 가난한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15세에 '원죄 없으신 성모의 딸들 협회'에 가입하여 자선 활동을 시작했다. 장티푸스 유행 당시 간호 봉사를 하였고, 회복 후에는 소녀들의 교육에 헌신하며 '성모 무염 시녀회'를 결성했다. 요한 보스코와의 만남을 통해 살레시오 수녀회를 설립하고 초대 수녀원장이 되었으며, 1872년 정식으로 수녀 서원을 했다. 그녀는 수녀들의 교육에 힘썼으며, 1877년에는 선교 수녀들을 우루과이로 파견했다. 1881년 흉막염으로 사망했으며, 1951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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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도메니카 마자렐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마리아 마자렐로 카드
마리아 마자렐로
존경 대상로마 가톨릭교회
칭호종교 자매 및 창립자
축일5월 13일
주요 성지토리노의 그리스도교인 도움의 성모 대성당
인물 정보
출생 이름마리아 도메니카 마자렐로
출생1837년 5월 9일
출생지이탈리아, 알레산드리아도, 모르네세
사망1881년 5월 14일
사망지모르네세
시복 및 시성
시복일1938년 11월 20일
시복 장소바티칸 시국, 성 베드로 대성당
시복자교황 비오 11세
시성일1951년 6월 24일
시성 장소바티칸 시국, 성 베드로 대성당
시성자교황 비오 12세
소속
소속 수도회FMA

2. 생애

성 마리아 마자렐로는 1837년 북부 이탈리아 알레산드리아현 모르네세에서 태어났다. 신앙심 깊은 부모 아래 성장했으며, 마을 사제 도메니코 페스타리노 신부의 지도를 받았다. 1860년 이탈리아장티푸스가 유행했을 때, 마을 사람들을 돌보다 자신도 병에 걸려 생사의 고비를 넘겼다. 기적적으로 회복한 후, 친구 페트로닐라와 함께 소녀들을 위한 재봉 교실을 열어 교육에 힘썼다. 이후 요한 보스코와의 만남을 통해 1872년 여성 수도회인 협력자 성모회를 공동으로 창립했다. 1881년 5월 14일 세상을 떠났으며, 1951년 비오 12세 교황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2. 1. 초기 생애

1837년 이탈리아 북부 알레산드리아현 모르네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조셉 마자렐로, 어머니는 마달레나 칼카뇨 마자렐리였으며, 그녀는 10명의 자녀 중 장녀였다. 가정 환경은 포도원 농가 또는 일용직 노동자 가정으로 묘사된다. 신앙심 깊은 부모 아래에서 성장했으며, 마을 사제였던 도메니코 페스타리노 신부의 지도를 받았다.

15세 때 페스타리노 신부가 조직한 '원죄 없으신 성모의 딸들 협회'(Associazione delle Figlie di Maria Immacolatait)에 첫 회원 중 한 명으로 가입했다.[1] 이 협회는 자선 활동으로 알려졌으며, 훗날 살레시오 수녀회 창설의 기반이 되었다. 마리아는 협회 내에서 합리적인 판단력, 헌신적인 태도, 긍정적인 마음, 그리고 젊은이들에 대한 애정으로 주목받았다. 아이들이 그녀를 잘 따랐다고 전해진다.

23세가 되던 1860년, 모르네세 마을에 장티푸스가 크게 유행하여 많은 주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마리아의 이모와 이모부(또는 삼촌과 이모)도 병에 걸리자, 마리아는 자원하여 그들과 그 자녀들을 돌보았다. 일주일 후 친척들은 회복되었지만, 집으로 돌아온 마리아는 장티푸스에 감염되었다. 병세가 위중하여 병자성사를 받기도 했으나 기적적으로 회복했다. 그러나 이 병으로 인해 이전의 건강을 잃고 몸이 쇠약해졌으며, 이전에 하던 농사일을 계속하기 어려워졌다.[1]

2. 2. 장티푸스 투병과 회복

마리아가 23세가 되던 해인 1860년, 이탈리아 전역에 장티푸스가 유행하면서 모르네세 마을에도 큰 피해를 주었다.[1] 많은 마을 사람들이 빠르게 감염되어 목숨을 잃었다. 그녀의 이모와 이모부(다른 자료에서는 삼촌과 이모[1]) 역시 병에 걸려 자리에 눕게 되자, 마리아는 자원하여 병든 친척들과 그들의 자녀들을 헌신적으로 돌보았다.

일주일간의 간호 끝에 친척들은 다행히 회복되었다. 하지만 마리아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이번에는 그녀 자신이 장티푸스에 걸리고 말았다.[1] 병세가 위중하여 병자성사(종부성사)까지 받았으나, 기적적으로 병상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장티푸스를 앓고 난 후유증으로 인해 이전의 건강과 힘을 잃고 몸이 쇠약해졌다. 한때 밭일을 거뜬히 해내던 강건함은 사라지고, 마르고 허약한 상태가 되었다.[1]

2. 3. 소녀 교육에 대한 헌신

장티푸스에서 회복되었지만 병으로 인해 몸이 쇠약해져 이전처럼 밭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1] 이에 그녀는 마을에서 재봉사 견습생으로 들어가 기술을 익혔다. 그녀가 젊은 시절 배운 이 기술은 훗날 그녀의 뒤를 이을 사람들에게 전수될 수 있었다.[2]

병에서 회복된 후 마을을 걷던 중, 마리아는 넓은 건물과 안뜰에서 많은 소녀들이 뛰놀며 웃는 환시를 보게 되었다. 이때 "그들을 너에게 맡긴다"라는 목소리를 들었다고 전해진다.[2]

19세기 당시 소녀 교육의 필요성은 절실했다. 마리아는 이 문제에 주목하고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당시 많은 농촌 출신 소녀들, 하녀, 공장 노동자, 거리 상인 소녀들이 도시로 몰려들었으며, 이들은 청소년 매춘과 같은 위험에 쉽게 노출될 수 있는 환경에 처해 있었다.[3]

마리아는 이 소녀들을 교육하고 기술을 가르쳐 거리 생활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고자 했으며, 몇몇 친구들을 설득하여 이 일에 동참시켰다.[3] 이렇게 모인 15명의 젊은 여성들은 '성모 무염 시녀회'를 결성했으며,[3] 이는 훗날 살레시오 수녀회의 모태가 되었다.[1] 페스타리노 신부는 이들을 영적으로 지도하고 공동체 생활을 위한 장소를 마련해주었으며, 이는 모르네세에서의 수도회 생활의 시작이 되었다. 시녀들은 어린 소녀들을 받아들여 돌보고, 신앙 교육과 함께 옷 만드는 기술을 가르쳤다.[2]

2. 4. 성 요한 보스코와의 만남

마리아 마자렐로가 활동하던 성모 무염 시녀회는 도메니코 페스타리노 신부의 지도를 받고 있었다. 페스타리노 신부는 시녀들을 영적으로 훈련시키고 공동체 생활의 기반을 마련했으며, 시녀들은 지역 소녀들을 돌보고 교육하며 기술을 가르쳤다.[2][3]

한편, 성 요한 보스코는 페스타리노 신부로부터 성모 무염 시녀회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당시 페스타리노 신부 역시 살레시오회 회원으로서 요한 보스코의 지도를 받고 있었다. 요한 보스코는 소년들을 위한 교육 사업을 펼치면서 소녀들을 위한 교육 기관 설립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페스타리노 신부의 이야기를 듣고 성모 무염 시녀회를 직접 만나보기로 결심했다. 그는 시녀회가 자신이 구상하는 여성 수도회의 기반이 될 수 있을지 알아보고자 했다.[2]

요한 보스코는 자신의 오라토리오 운영 기금을 모금한다는 명분으로 소년 밴드를 이끌고 모르네세를 방문했다. 그러나 그의 실제 목적은 성모 무염 시녀회의 활동을 살펴보고, 남성 수도회인 살레시오회와 같은 역할을 할 여성 수도회를 설립할 가능성을 확인하는 것이었다.[2] 이 만남은 훗날 마리아 마자렐로와 요한 보스코가 협력하여 1872년 살레시오 수녀회(정식 명칭: 협력자 성모회)를 공동으로 창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3. 살레시오 수녀회 창립

북부 이탈리아 알레산드리아주 몰네제에서 1837년 태어난 마리아 마자렐로는 신앙심 깊은 가정에서 성장했다. 마을 사제 도메니코 페스타리노 신부의 지도로 신심회 "무원죄의 성모회"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1860년 장티푸스가 유행했을 때 헌신적으로 환자들을 돌보다 자신도 병에 걸려 위중했으나 기적적으로 회복했다. 이후 삶의 방향을 고민하며 친구 페트로닐라와 함께 소녀들을 위한 재봉 교실을 열어 교육에 힘썼다.

이후 요한 보스코와의 만남은 살레시오 수녀회 창립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872년, 마리아 마자렐로는 요한 보스코와 함께 여성 수도회를 공동으로 창립하였다. 이 수도회는 돕는 이 성모 마리아에 대한 감사의 의미를 담아 "협력자 성모회"(훗날 마리아 도움의 딸들, 즉 살레시오 수녀회)로 명명되었다. 그녀는 1881년 5월 14일에 선종했으며, 1951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3. 1. 창립 과정

콜레조(Collegio), 마리아 도움의 딸들의 첫 번째 공동체


1867년, 보스코는 그들을 만나 자신의 제안에 대한 열렬한 반응을 얻은 후, 첫 번째 생활 규칙을 작성했다.[4] 마리아 마자렐로는 공동체의 훌륭한 정신과 자선 활동의 중심으로 여겨졌으며, 서른 살에 공동체의 초대 원장으로 선출되었다.[4]

여러 어려움을 거쳐 1872년 7월 31일, 마리아 마자렐로를 비롯한 15명의 젊은 여성들이 아퀴 주교, 보스코 신부, 페스타리노 신부 앞에서 첫 서원을 했다.[4] 이 날이 새로운 수도회의 공식적인 시작이 되었다. 서른다섯 살의 마리아 마자렐로 수녀를 포함한 15명의 수녀들은 새로 창설된 마리아 도움의 딸들(살레시오 수녀회)의 첫 구성원이 되었다. 마리아 도움의 딸들은 공식적으로 창립된 것이다. 마리아는 보스코로부터 총원장 선출을 위한 회의가 열릴 때까지 임시 수녀원장직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았다.[4] 살레시오회의 여성 수도회인 마리아 도움의 딸들은 사제와 형제들이 토리노에서 소년들을 위해 하던 일을 소녀들을 위해 하고자 했다.

3. 2. 교육 활동과 성장



1867년, 요한 보스코는 마리아 마자렐로와 동료들을 만나 그들의 열정에 감명받아 첫 번째 생활 규칙을 작성했다. 마리아 마자렐로는 공동체의 훌륭한 정신, 유머 감각, 낙관주의, 자선 활동의 중심이었기에 자연스럽게 초대 수녀원장으로 선택되었다.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그녀는 서른 살의 나이에 새로 시작하는 공동체의 초대 원장직을 맡게 되었다.[4]

많은 훈련과 어려움, 심지어 마을 사람들과의 갈등(마을 사람들이 모금하여 지은 소년 학교를 요한 보스코가 수녀회에 넘겨주었기 때문)을 겪은 끝에, 1872년 7월 31일, 마리아 마자렐로를 포함한 열다섯 명의 젊은 여성이 아퀴 주교, 영적 아버지인 요한 보스코, 그리고 도메니코 페스타리노 신부 앞에서 수녀로서 서원을 했다.[4] 이 날은 새로운 수도회, 마리아 도움의 딸들이 탄생한 날이다. 서른다섯 살에 수녀복을 입은 그녀는 이제 마리아 마자렐로 수녀로 불리게 되었다. 마리아 도움의 딸들은 살레시오 수도회의 여성 수도회로서, 남성 사제와 형제들이 토리노에서 소년들을 위해 하던 교육 및 사목 활동을 소녀들을 위해 펼쳐나가고자 했다.[4]

살레시오 수녀회의 총원장으로 선출된 후, 마리아 마자렐로는 수녀들이 읽고 쓰는 능력을 제대로 익히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당시 많은 수녀가 교육받을 기회를 갖지 못했기 때문에, 그녀는 수녀들의 교육에 힘썼다.[5] 그녀의 헌신은 지적 발전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모든 면에서 세심한 어머니와 같았기에, 오늘날까지도 살레시오 수녀회에서는 그녀를 "마자렐로 수녀원장"이라고 애정 어린 어조로 부른다.

1877년, 최초의 선교 수녀들이 우루과이로 파견되었다.[6] 마자렐로 수녀원장은 그들을 이탈리아 제노아의 항구까지 직접 배웅했고, 이후 프랑스로 건너가 그곳의 수녀들을 방문했다. 마르세유에서는 타고 가던 배가 고장 나 수리하는 동안 모든 승객이 하선해야 했다. 수녀들을 위한 숙소가 마련되어 있다고 들었으나 착오로 잠자리가 없게 되자, 마자렐로 수녀원장은 좌절하지 않고 가져온 시트에 짚을 채워 임시 침대를 만들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그녀는 심한 열병을 앓게 되었다. 다음 날 아침, 이미 지친 동료들을 걱정하며 간신히 일어나 선교사들을 배웅한 뒤, 남은 수녀들과 함께 생시르쉬르메르에 있는 수도원과 고아원으로 이동했다.[5]

토리노에 있는 마리아 도움의 딸들 바실리카 내 마리아 마자렐로 성녀상

4. 죽음과 시성

프랑스 생 시르 방문 중 흉막염 진단을 받고 40일 동안 병상에 누워 있었다.[5] 의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공동체에서 죽고 싶다"는 의지를 밝히며 이탈리아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귀국 여정 중 돈 보스코와 마지막으로 만날 수 있었다.[5]

로마의 산타 마리아 도메니카 마자렐로 성당에 있는 마리아 도메니카 마자렐로 동상


1881년 4월 초, 니차 몬페라토로 돌아온 마리아는 잠시 건강을 회복하여 공동체 활동을 재개했으나, 무리한 탓에 병이 재발했다. 4월 말에는 상태가 위독해졌다. 결국 1881년 5월 14일 새벽, 종부성사를 받은 후 주변 사람들에게 "안녕. 이제 갑니다. 천국에서 뵙겠습니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44세의 나이로 선종했다.[5]

마리아 마자렐로는 1938년 11월 20일에 시복되었고, 1951년 6월 24일에 성인으로 시성되었다.[5] 그녀의 부패하지 않은 유해는 이탈리아 토리노에 있는 우리들의 구세주 마리아 대성당에 안치되어 공경받고 있다.[5] 로마 남동부에는 그녀의 이름을 딴 산타 마리아 도메니카 마자렐로 성당이 있다.[5]

참조

[1] 웹사이트 Mary Mazzarello https://salesiansist[...] Salesian Sisters of St John Bosco 2007-04-01
[2] 웹사이트 Santa Maria Domenica Mazzarello su santiebeati.it http://www.santiebea[...] 2016-11-17
[3] 서적 Maria-Domenica Mazzarello https://www.oxfordre[...] The Oxford Dictionary of Saints 2011
[4] 웹사이트 MARIA DOMENICA Mazzarello, santa in "Dizionario Biografico" http://www.treccani.[...] 2016-11-17
[5] 간행물 Gold Without Alloy: A Brief Account of the Life of St. Mary Mazzarello https://donboscowest[...] Salesians of Don bosco - USA West
[6] 웹사이트 Mary Domenica Mazzarello https://www.cgfmanet[...] Instituto Figlie di Maria Ausilliatrice
[7] 웹사이트 Figlie di Maria Ausiliatrice - Salesiane di Don Bosco https://www.cgfmanet[...]
[8] 웹사이트 5月13日 聖マリア・ドメニカ・マザレロ修道女 Laudate 女子パウロ会 http://www.pauline.o[...]
[9] 웹사이트 MARIA DOMENICA Mazzarello, santa Dizionario Biografico http://www.treccani.[...]
[10] 웹사이트 Maria Dominika Mazzarello Ökumenisches Heiligenlexikon https://www.heilig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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